스무 살 때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우리는 사랑일까’처럼, 보통의 일상적인 누구나 할 법한 연애와 사랑에 대한 색다른 통찰과 고찰이 담겨 있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필자 역시 이러한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다. “너는 나를 왜 좋아한다고 하니? 단순한 호기심 아니야?”라는 질문에, “그건 아닌 것 같고, 나도 잘 모르겠어. 꼭 이유가 필요한가.”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일 것이다. 필자의 경우 살면서 정말 사랑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사랑했던 이유는 생각하면 수 없이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착했고 배려심이 많았고, 무엇보다 나를 여자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소중하게 생각해 줬고, 내 진심을 고마워했었다. 그는 때로 나에게 감동했다고 했었지만, 나는 그가 내 진심을 알아준 것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사실 서로간의 사랑이 충만할 때에는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무한히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츰 마음이 변하고, 어느 순간 관계를 감당할 수 없다 느끼기 시작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은 줄어들고 사랑할 수 없는 이유들은 늘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무엇 때문에’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되어야 하나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중 ‘꽃이 없어서 꽃을 그려 드립니다.’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 관한 일화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데, 가난한 화가였던 클림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꽃을 그리고 엽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클림트가 사랑했던 여인이 그의 그러한 정성에 감동해 그의 마음을 받아 줬을지 아니면 클림트보다는 재정적으로 넉넉한 사람을 선택했을지 모르지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더라면 그의 피치 못할 현실적인 상황까지도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사랑을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또 그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라고 하나보다. (클림트가 꽃을 그림으로 그려 편지를 써 줬던 여인은 에밀리 플뢰게였고, 두 사람은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고 평생 정신적인 교감을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클림트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에밀리를 곁에 뒀다고 한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현존하는 한국 화가는 김종학 화백이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이혼 후의 고독과 절망감을 위로해 준 설악산의 풍경이 그의 작품에 담겨 있기에,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말 없는 위로를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보내며 작가로서의 수작(秀作)을 남길 수 있었던 그에게는, 그러한 고통의 시간들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까. 말 그대로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그는 가장 최악의 시기를 견뎌낸 이후부터 한국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인생에서의 행복과 불행은 누구에게나 그 절대치가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어떠한 것이든 마냥 나쁜 것도, 또 마냥 좋은 것도 없는 듯하다. 개인이 살면서 가장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 중 하나라는 이혼이든, 경제적인 어려움이든 어차피 본인에게 일어난 일들이고 또 이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솔직하게 본인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서로간의 신뢰를 더욱 돈독히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가끔 그러한 사실 자체를 본인의 약점이라 생각하여 숨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살 수는 없는 것이고 연극은 끝나게 되어 있다. 거짓된 모습으로 맺은 관계는 결국에는 허상이 될 수밖에. ‘무엇 때문에’가 아닌 ‘무엇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은, 서로간의 진실한 소통에 바탕을 둔 이해와 신뢰가 쌓였을 때 가능할 것 같다. 그러한 관계라면 당연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단지 너이기에 사랑한다.”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